민주화, 문민시대를 열었던 큰 별 김영삼 전대통령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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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찬 작성일15-11-22 14:57 조회1,432회 댓글0건본문
민주화, 문민시대를 열었던 큰 별 김영삼 전대통령 서거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대한민국의 큰 별이 또 하나 졌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첫 민주화 문민시대를 열었던 김영삼 전대통령이 서거했다. 22일 오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과 우리나라 정치개혁에 앞장서며 광복 이후 현대정치사(史)에 큰 족적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 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도중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 원장은 밝혔다. 오 원장은 오전 2시 서울대병원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김 전 대통령이 0시22분(병원기록 기준) 서거했다"고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공식발표했다. 향년 88세다.
오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고열로 입원하셨고,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이송해 치료했지만 상태가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오 원장은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폐혈증 급성 신부전'이라고 밝혔다. 그는 "원래 심장병을 갖고 있어 시술을 (여러 차례) 받았다"며 "지병이 악화돼 사망했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오 원장에 따르면 차남 김현철씨 등 가족들은 김 전 대통령의 임종을 지켰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최연소 국회의원, 최다선 9선의원, 3번의 야당총수, 문민정부 대통령까지 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김 전 대통령은 유신 시절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던 야당 정치인이었다. 1987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 실패로 지지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기기도 했다. 1990년에는 “호랑이 잡으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며 '3당통합'으로 35년간의 야당 생활을 청산하고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대통령 당선 후 '하나회'를 청산하고 금융실명제 도입 등 과감한 개혁으로 국민들의 성원을 받기도 했지만 임기말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요청을 하면서 나라를 부도로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이 두 명이 있었지만 어릴 때 요절해 사실상 외동아들 역할을 했다. 그는 문중의 장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기독교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김 전 대통령 역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강직하고 배포 넘치는 할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아 사춘기 시절 일본인들과 학교에서 잦은 다툼을 벌였다. 1945년 경남중학교로 전학을 한 김 전 대통령은 이때부터 대통령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 답했다. 이 때부터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곤 했다.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3학년 때부터 장택상 국회의원의 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1952년 장 의원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그는 국무총리실 인사담당 비서관을 경험한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결심한 그는 자유당에 입당해 상대 후보를 2만여 표차로 누르고 약관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에 오른다. 여당 정치인으로 시작한 그를 야당 정치인으로 만든 계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사오입'을 통한 3선 개헌안 강행 통과였다. 1954년 자유당을 탈당한 그는 이듬해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며 야당생활을 시작한다.
유신 시대와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며 그는 야당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다. 1969년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해 비판을 가하다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당사에 보호하다가 강제연행되며 국회의원직에서 강제 제명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를 야당을 상징하는 정치인으로 성장시키는 일이 됐다. 의원직이 제명되자 그는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같은 해 뉴욕타임즈를 통해 미국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유신 후반기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그의 말은 널리 회자됐다.
퇴임 직후 불거진 아들 김현철씨의 비리와 측근이자 인척인 홍인길씨 등의 뇌물수수 사건 등으로 매끄럽지 못한 날을 보냈지만 사태 수습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의 지도자 및 민주당 내 상도동계 지도자로 여야에 영향력을 고루 미쳤다. 김대중 정부 시절 다소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던 그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노 대통령을 정계에 입문시킨 만큼 잘 되기를 바래 여러차례 충고도 했지만 노 대통령이 이를 소홀히 한 채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이런 결과가 왔다"며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초반 호의적이었으나 18대 총선에서 김현철씨 등 측근이 대거 탈락하자 이를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독재자의 딸' '칠푼이'와 같은 거친 용어를 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소신을 밝히곤 했다.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환이 2009년 급속도로 악화되자 병문안해 자신과의 관계를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면서 "오랜 동지적 관계에 있었고 또 경쟁관계에 있었다. 애증이 교차한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2015년 11월 혈액감염 의심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그는 끝내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故김영삼 전대통령의 기록들
한국 정치사의 거목인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그 위상에 걸맞게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YS는 1954년 만 25세의 나이로 3대 국회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YS는 당시 "기쁜 생각보다 걱정이 앞선다. 젊은이의 대표라는 자부심도 이따금씩 가져보지만 내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앞으로 젊은이들의 길을 가로막아버리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며 "앞으로 4년 동안 순순히 공부하는 시간으로 작정하고 있다"는 소감을 밝혔다. YS의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깨지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 누구도 YS의 기록을 깨지 못 했다.
의원직 제명도 헌정사상 최초였다. 제1야당의 당수로서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를 통해 민중혁명으로 팔레비왕정 체제가 무너진 것을 언급하며 한국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9월29일 김영삼 의원에 대한 제명 방침을 정했고, 같은 해 10월4일 여당의원 159명이 '김영삼 의원 징계안'을 10분만에 기습 처리했다. YS는 자신의 의원직 제명에 대해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라며 "25세에 국회의원이 돼 7선의 최다선 의원인 나는 의회민주주의의 신봉자이며 국민과 더불어 떳떳이 가게 됐으니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발언도 이때 나왔다.
YS는 한동안 최장 단식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5월 가택연금된 후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YS는 5·18 3주년을 맞아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단식에 들어갔으며 전두환 정권은 YS가 단식을 한 지 1주일이 지나자 그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YS는 병원에서도 단식을 계속했다. 이를 통해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다. 이 단식은 추후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됐고,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헌정사상 최다선 기록도 YS가 보유하고 있다. YS는 1954년 3대 국회때 자유당 의원으로 첫 등원한 이래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인 1992년까지 3·5·6·7·8·9·10·13·14대 의원으로 활동, 9선을 기록했다. YS와 함께 김종필 전 의원(JP), 박준규 전 의원이 9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민주화 거목(巨木) 故김영삼 전대통령, 여야 정계 인사들 발디딜틈 없는 조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22분 급성심부전 등으로 서거한 가운데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첫 날부터 조문객들의 발길이 발디딜틈 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거산(巨山)이라는 호 답게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거물급 정치인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 여야 지도부는 물론 고인의 정치적 동지였던 상도동계 인사들의 발길이 끊일 틈새가 없다.
또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그의 빈소 앞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해외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고인의 마지막 길을 기렸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유족측은 정부와 국가장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지는 국립현충원으로 정해졌으며 발인은 26일이다. 임종을 지켜본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새벽부터 빈소 준비에 직접 나서며 조문객을 맞았으며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 손명순 여사는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 섰다.
이날 빈소를 찾은 정치인들을 비롯한 조문객들은 한 목소리로 김 전 대통령을 위대한 지도자로 칭하며 고인을 애도했다. 오전 8시35분께 빈소를 찾은 김무성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에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위대한 개혁 업적을 만드신 불세출의 영웅이었다"며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저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다. 그래서 조용히 가시는 길을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김 대표는 상주 역할을 자처하며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주요 회의를 제외하고는 빈소를 지키기도 했다. 빈소에 들어서면서는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를 감싸 안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상도동계 좌장으로 불렸던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김 전 대통령은 저의 정치적 대부셨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고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이렇게 급하게 가실줄은 몰랐다. 말로 다 못한다"며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회고했다. 이날 김영삼 전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주요 인사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 = "산업화, 민주화. 민주화의 한 축이 떠나셨다", "하나회 청산, YS만이 할 수 있었던 것"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앞장선 분은 김영삼 대통령밖에 없다”
*전두환 전대통령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분이니까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
*김종필 전 국무총리 = "신념의 지도자로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분"
*정의화 국회의장 = "우리나라 민주화의 최선봉장이었던 이 시대의 영웅을 잃은 슬픔을 무엇에 비견하리오“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 "대한민국의 큰 별이 가셨다", "김 전 대통령은 저의 정치적 대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나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상주 역할 할 것"
*이희호 여사="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과 대한민국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우리 국민은 김전 대통령을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 "민주화의 역사를 만든 아주 큰 별", "하나회 척결·금융실명제 업적 길이길이 역사 속에서 빛날 것"
*박희태 전 국회의장 = "한없이 따뜻한 정치 대인이었다", "반대하는 사람도 설득하는 뜨거운 포용력이 장기...마지막 남은 민주화의 상징이 떠났다"
*정동영 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 = "민주화 시대에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우리나라 지도자로서 타계하신 데 대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특히,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신념의 지도자로서 국민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는 바 본인도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 조문해 마지막 남은 3金중 한 사람으로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명박 전대통령은 이날 오전 11시께 무거운 표정으로 "아이고…"라는 탄식과 함께 빈소로 들어왔다.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킨 유일한 마지막 인물이 이제 사라졌다"면서 "(YS가) 참 건강하셔서 오래 사실 걸로 생각했다. 입원했을 때도 그래도 퇴원할 거라 생각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 전 대통령은 또 김 전 대통령의 국가장을 준비하는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에게도 "(장례 준비를) 잘 좀 해달라"라고 부탁하자 정 장관은 "어르신(YS)과는 각별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故김동영 의원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시절 '좌(左)형우 우(右)동영'이라 불리며 김 전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한 민주화 동지 최형우 전 내무장관은 서울대병원 빈소에 들어서며 오열하며 통곡했다. 최 전 장관은 지난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기 전 갑작스러운 중풍으로 쓰러졌고 지금까지 정치일선에 물러서 있으며, 이날도 불편한 몸으로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빈소를 찾았다.
이밖에도 문민정부 시절 당정청의 요직에서 일했던 문정수 전 부산시장,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유종하 전 외무장관, 오정소 전 보훈처장, 정재문 전 의원, 유도재 전 총무수석 등이 오전 빈소를 찾았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김효재 전 정무수석, 이동관 전 홍보수석, 장다사로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등 MB 정부 인사들도 이 전 대통령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고향인 전북 순창에 칩거 중인 정동영 전 의원 등 야권 인사들도 조문했다.
김영삼 전대통령과 영원한 민주화 동지며 정치 라이벌이었던 故김대중 전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과 대한민국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우리 국민은 김전 대통령을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다“라는 언급을 했으며 동교동계 인사들과 함께 조문할 예정이다.
야당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 전병헌 최고위원과 정청래 최고위원, 문희상 전 비상대책위원장, 최재성 의원 등이 빈소를 방문했다. 정동영 전 의원도 일찌감치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야당은 이후 합동조문을 하기로 했으며 전 정치일정을 중지했다. 이밖에도 이날 빈소에는 한광옥 전 의원과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과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임태희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동관 전 청와대홍보수석,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빈소를 찾았고 계속 각계의 조문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 국가장 의결
정부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의결했다. 정부는 이날 새벽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유족과 국가장에 합의하고 오후 1시께 정부서울청사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장례 절차를 심의했다. 국가장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확정된다. 장례명칭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으로, 장례 기간은 26일까지 5일장으로 정해졌다. 국가장법에 따라 장례위원회가 설치되며, 위원장은 관례대로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는다.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다. 안장식은 영결식 종료 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다. 장지는 국가보훈처와 국방부가 유족의 뜻을 들어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장 기간에는 조기가 게양된다. 정부는 국민이 함께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자치단체가 유족과 협의를 거쳐 전국 각지에 분향소를 설치하도록 했다. 정부 대표 분향소는 국회의사당에 마련되며, 재외공관 분향소도 설치된다. 행자부 안에는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실무추진단이 구성된다. 실무추진단은 영결식과 안장식 준비, 유가족 지원, 분향소 운영, 식장 설치와 홍보 등 실무를 담당한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이날 임시 국무회의를 시작하면서 "고인께서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으며 제14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국가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고 회고하고, "정부는 이번 장례를 국가장으로 해서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예우에 빈틈이 없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정종섭 행자부 장관은 "대한민국을 성공한 나라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으며, 전 국민과 함께 깊이 애도한다"고 조의를 표했다. 정 장관은 이어 "앞으로 구성될 장례위원회를 중심으로 국가장 장례절차를 유족과 긴밀히 협의, 전직대통령 예우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최대한 국가장을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치사, 헌정사에 민주화와 문민시대를 연 故김영삼 전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추적사건25시 편집부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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