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영삼 전대통령의 공(功)과 과(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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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찬 작성일15-11-22 21:28 조회1,365회 댓글0건본문
故 김영삼 전대통령의 공(功)과 과(過)
22일 새벽 서거한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필생의 신념이었던 민주화 투쟁과 대통령 재임 시 눈부신 개혁으로 헌정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우리시대 큰 별이었다. 스포츠닷컴, 추적사건25시는 국민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하며 부인 손명순 여사 등 유족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의 민주화 투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협력하고 경쟁하며 우리 현대정치사를 이끌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은 그의 서거로 파란만장했던 ‘양김(兩金)시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민주화와 국가발전에 바쳐진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YS’란 애칭과 함께 오래도록 국민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외신들, ‘대한민국 헌정사, 정치사를 바로세운 민주화의 큰 별 서거’ 보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 유명한 김전대통령의 말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거의 없다. DJ와 더불어 김영삼 전대통령이 없었더라면 과연 대한민국은 확실하고 자랑스러운 자유민주주의 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었을까? 세계 주요외신들은 30여년에 걸친 군정(軍政)에 종지부를 찍은 ‘문민정부’의 대통령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이끈 야권 지도자로서의 김영삼의 정치역정과 1993∼1998년 대통령 재임 기간의 공과를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중국 신화통신은 22일 오전 1시 7분(서울시간) ‘김영삼 전 한국 대통령 서거’라는 짧은 제목으로 첫 기사를 전했다. 뒤이어 AP통신은 오전 2시 9분 서울발 기사로 서울대병원의 공식 발표를 인용, “김영삼 전 한국 대통령이 8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는 내용의 단신을 긴급기사로 내보냈다. AP통신은 이어진 2보에서 김 전 대통령이 수년간 군사독재에 항거해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받은 대통령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AFP통신은 고인이 대한민국의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대통령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30년 이상 이어진 군정이 막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끈 인물로 1980년대 초 2년의 가택연금을 당했던 사실, 대통령 취임 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전임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했던 점을 부각했다.
로이터통신은 고인이 20대 후반에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한 뒤 권위주의 정권 지도자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면서도 민주적 개혁을 추진했다고 전했다. CNN도 한국 언론을 인용, 김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온건 성향의 야당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의 대변자였다고 전했다. 또 대통령으로서는 정부 개혁과 정치 부패 척결에 힘썼다고 소개했다.
일본 언론은 고인의 민주화 운동 이력과 자국과의 인연을 부각하며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김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긴급뉴스로 전하면서 “재임 중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체포를 명하고 1980년 광주사건(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진상 규명을 꾀하는 등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닛케이)은 김 전 대통령이 역사나 영토를 둘러싸고 일본에 강경한 발언을 많이 했으나 2002년에는 와세다(早稻田)대 특명교수로 취임했다고 소개했다. 산케이 신문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중에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서울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독도에 접안 시설이 건설된 것을 전했다.
중국 언론들은 고인을 한국에서 반부패 변혁의 바람을 일으킨 대통령으로 평가했다. 중국신문망은 한국 언론을 인용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과 이력을 조명하면서 그가 대통령 취임이후 반부패, 청렴을 기치로 변혁의 바람을 일으켰으며 개인의 배경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실천했다고 평가했다. 신문망은 또 김 전 대통령이 당시 아무도 건드리려 하지 않았던 군부에 대한 전격적인 개혁을 단행해 비(非) 하나회 출신 김동진과 김도윤을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에 기용했다고 상세히 전했다.
이밖에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망과 광명망, 신랑망 등도 그가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으며 금융실명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을 처음 도입하는 등 반부패의 변혁을 주도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USA투데이 등과 함께 ABC방송, 영국 BBC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도했다. 특히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김 전 대통령이 문민시대라는 정치적 전환기를 열었음을 전했다. 재임 기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높아진 점, 임기 전반기의 빠른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국이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 등은 업적으로 평가된다고 이 WSJ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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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꼽는 대한민국 헌정사, 정치사의 거목(巨木) 김영삼 전대통령의 공과(功過)
김영삼 전대통령의 공(功)
*하나회 숙청과 역사 바로세우기-YS의 업적을 거론할 때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 것 중의 하나가 이전 군부정권의 핏줄이었던 육사출신 엘리트 장교 모임 ‘하나회’를 해체한 것이다. 이는 40년 가까이 이어져온 군부정권의 정치 참여를 종식시키고 군사독재 부활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진정한 문민화를 성취했다는 점에서 현대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또 YS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하면서 ‘5·18 특별법’(1995)을 제정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12·12’ 및 5·18에 대한 책임과 함께 뇌물수수 협의 등으로 구속했다.
*지방자치제-지방분권의 첫기틀 마련, 북핵위기시 전쟁방지-YS는 이와 함께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1995년 그전까지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해 내려보내던 시도지사를 주민이 직접 뽑는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를 도입함으로써 지방분권의 첫 기틀을 마련했다. YS는 남북관계에서도 큰 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뻔 했다. 북핵 위기를 넘긴 남북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중재로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으나 불과 2주 전인 7월9일 김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다.
*국민소통, 권위주의 타파-YS는 또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고 지방 곳곳의 대통령 안가(安家)를 철수하는 권위주의 타파에도 나섰다.
*금융실명제 실시, OECD가입-하나회 해체와 함께 YS의 가장 큰 공으로 거론되는 게 바로 ‘금융실명제’ 도입이다. 1993년 8월 12일을 기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공표함으로써 외형적 성장에만 전력 투구해온 한국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만들어 부정부패를 막소 공정하게 과세를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기득권 층의 엄청난 반발을 무릅쓰면서 전격 실시한 것이다. 또 공직자 재산등록제를 실시한 것도 YS였다. YS 정부는 또 한국이 서방선진국들의 친목모임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수출 10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는 등 중진국의 기틀을 확실히 다지는 시기였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과(過)
차남 현철씨 비리-집안단속 실패-그러나 이런 결단력있는 큰 업적 이외 김영삼 전대통령은 여러 과(過)도 있는 회한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아들 현철씨가 청와대와 국정원 등에 측근들을 앉히고 사실상 국정을 농단한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소통령’ 권력을 행사해온 끝에 한보비리특혜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집안 다스리기에 실패함으로써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외환위기 예측,막지못한 실정-정권 마지막 해인 1997년의 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금융기관의 부실, 방만한 경영을 해온 대기업의 연쇄부도, 단기외채의 급증 등으로 모라토리움(채무지불유예) 선언 위기에 이르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사실상 경제주권을 내준 것이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YS 정부가 임기내 1인당 1만 달러 소득과 OECD 가입이라는 치적에만 관심을 쏟다보니 정경유착이라는 후진적 경제시스템과 관치금융이라는 후진적 금융환경을 선진화하지 못한 채 자본시장을 개방해 초래한 위기”라고 말한다. 물론 1997년 여름 정치권의 반대로 무산된 금융기관 개혁법안만 통과됐어도 ‘IMF 부도’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사고공화국-YS 정권내내 대형 사건사고가 끊이지 안았다. 1993년 10월10일 여객선 서해 페리호가 전북 부안군 앞바다에서 침몰해 292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고 1994년 10월21일에는 서울 성수대교 붕괴되는 초유의 사고가 일어났다. 또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공사장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건으로 101명이 사망하는 등 24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같은 해 6월 29일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무려 501명이 사망하고, 6명 실종, 937명이 부상하는 전대미문의 사고가 있었다. 1997년 8월6일에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괌에서 추락해 승객 승무원 229명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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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대통령의 마지막 남긴 말은 "통합"과 "화합"
'한국 민주화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당부는 평소 즐겨하던 붓글씨로 쓴 '통합'과 '화합'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22일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문 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의 사실상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현철씨는 "(김 전 대통령이) 2013년에 입원하셨는데, 사실 말씀을 잘하진 못하셨다"면서 "필담 식으로 그땐 글씨를 좀 쓰셨는데, 평소에 안 쓰시던 '통합'(統合)과 '화합'(和合)을 쓰셨다"고 회고했다.
현철씨는 "평소에 안 쓰시던 건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물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별다른 언급 없이 쓴 글을 가리키며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처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건강이 더 악화돼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필담도 나누지 못하게 됐다. 사실상 '통합'과 '화합'이 김 전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남긴 유언인 셈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평생을 바쳐 일군 민주화와 대한민국에 남긴 국가발전에 대한 공헌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이제 역사의 평가에 맡길 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이제 무거웠던 역사의 짐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한 영면에 드시기를 빌며 국민과 함께 명복을 빌고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추적사건25시 편집부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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