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고시촌 골목, 中 관광객 끼니식사로 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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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재복 작성일 15-02-02 13:46본문
[류재복 대기자]
주말을 앞둔 16일 오후 노량진 먹자골목. 1호선 노량진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곧바로 이어지는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듀티 프리(Duty Free)’가 적힌 쇼핑백을 든 요우커(遊客·중국인 관광객)였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고향 친구도 볼 겸해서 자유여행으로 방한한 한베이리(27·여)는 “여행 계획을 세우며 노량진을 ‘꼭 가봐야 할 곳’에 넣었다”며 “한국의 중국 유학생들이 웨이보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싸고 다양한 노량진의 먹거리 사진을 자주 올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량진 수산시장에 들른 뒤 육교를 이용해 먹자골목으로 건너왔다”고 덧붙였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요우커들에겐 유명 관광지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도민준이 ‘개불’을 사는 장면이 나오면서 필수 코스가 됐다. 동선이 자유로운 이들이 시장을 들렀다가 자연스레 먹자골목으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노량진에 패키지 관광객보다 자유여행객이 몰리는 이유다. 한베이리는 “한국 특유의 매운맛을 경험할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매우 다양한 음식과 싼 가격에 놀랐다”고 말했다.
3000원짜리 컵밥으로 대표되는 노량진 먹자골목이지만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베트남 쌀국수, 대형 수제버거와 같은 식사거리에서부터 팬케이크·와플·호떡 등 주전부리, 아메리카노·생과일주스까지 그야말로 풀코스가 마련돼 있다.
강릉에서 남자친구와 노량진을 찾은 박도원(24·여)씨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면 유명 블로거들이 ‘노량진에서 즐길 수 있는 음식 톱10’ 같은 다양한 소개글을 올려놨다”며 “남친이랑 둘이 먹어도 1만원 정도면 식사에 후식·커피까지 해결되는 게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남자친구 유인혁(25)씨도 옆에서 거들었다. “매운 맛이 솨라있네(살아 있네)!”
노량진 먹자골목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땐 떡볶이·순대를 파는 노점들뿐이었다. 노량진의 명물이 된 컵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0년 전후다. 주머니가 가벼운 공시생(공무원시험 준비생)·재수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여러 노점이 생겨났다. 소설가 김훈이 지난달 발표한 단편소설 ‘영자’에는 ‘공시생의 노량진 먹자골목’ 분위기가 잘 담겨 있다.
“저녁 여섯 시 무렵에는 시장한 구준생(9급 공무원 준비생)들이 컵밥을 파는 노점 앞에 줄을 섰다. 카레라이스, 제육덮밥, 김치볶음밥은 이천원이었고 그 위에 계란프라이를 얹은 크라운컵밥은 이천이백원, 계란프라이 위에 햄버거 한쪽을 더 올린 로열컵밥은 이천육백원이었다. 인공조미료와 식용유를 끓이는 냄새가 퍼져서, 거리는 시장했다.”
하지만 최근 노량진 먹자골목의 고객은 크게 확대됐다. 40~50개의 노점과 식당이 수년간 ‘값과 맛’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했고, 그 사이 수많은 히트작이 생겨났다. 최근 1~2년간 퓨전 호떡, 터키 케밥, 스페인 추러스 등 신메뉴가 속속 등장했다. 2009년 말부터 ‘폭탄밥’(컵밥의 한 종류)을 파는 김태화(57)씨는 “맛있게 매워야 한다”며 “우리 가게 소소는 캡사이신 농도만 높인 질 낮은 컵밥 소스가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엔 프랜차이즈 외식업체 영업본부장이 김씨를 찾아와 “억대의 돈으로 보상할 테니 레시피를 공유하자”고 했으나 거절했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지름이 4.5인치(11.43㎝)나 되는 ‘지존(G-zone)빅버거’는 양 용(40)씨의 아이디어다. 96년부터 노량진에서 노점상을 운영한 그는 원래 닭꼬치를 팔았다. 2008년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국을 강타하며 재료값이 오르자 안심 먹거리로 ‘수제버거’를 떠올렸다. 가게 바로 앞에 맥도날드 매장이 있지만 양 씨는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했다. 저렴한 가격(2500원)뿐만 아니라 패스트푸드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맛이 경쟁력이라고 했다. 그의 버거엔 계란프라이와 백년초로 만든 소스가 들어간다. 고기 패티는 매일 영등포시장에서 직접 떼어 오는 돼지고기가 재료다.
포장마차에서 베트남 쌀국수·볶음국수를 파는 장경복(63·여)씨는 노량진 컵밥의 원조다. 2007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컵밥을 만들어 팔았다. 하지만 컵밥집이 우후죽순 늘어나자 차별화하려고 쌀국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컵밥의 자극적인 맛, 버거의 고열량을 꺼리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다. 그의 가게를 시작으로 동남아 음식을 파는 노점과 식당도 늘고 있다.
노량진 골목에선 각양각색의 1000원대 주전부리를 만날 수 있다. 팬케이크에 샐러드와 소시지를 얹은 ‘오가네 팬케이크’는 영업 시작 전부터 손님들이 장사진을 친다. 이날도 족히 20m 정도의 줄이 서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오가네 팬케이크 만드는 법’이 인기 검색어일 정도다. 호떡 노점을 운영하는 안정덕(47)씨는 “11가지 종류의 호떡을 파는 곳은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차렐라 치즈가 듬뿍 들어간 이탈리아 호떡과 초콜릿잼을 넣은 누텔라 호떡 등 다양한 퓨전메뉴가 특징이다.
'밥값보다 비싼 커피’는 노량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노량진 맥도날드 바로 맞은편에 있는 마카다 커피숍은 브라질산 원두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1000원에 판매한다. 여기에 500원을 더 내면 주는 ‘점보’ 사이즈는 두 명이 나눠 마셔도 충분한 수준이다. 제철과일을 갈아 넣은 생과일주스(1500원)도 노량진 고시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