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부도의 진짜내막, 故임춘원의 증언, <기자수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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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병찬 작성일 15-04-07 10:07본문
진로부도의 진짜 내막, 故임춘원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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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8일 일요신문이라는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베일에 싸여있던 진로그룹의 경영권에 대한 정치권 개입과 주먹패 출신 정학모씨의 진로그룹 참여 경로가 드러난 적이 있었다. 3선 국회의원이었으며 한때 진로의 지분 30% 이상을 갖고 있던 임춘원씨(전3선 국회의원, DJ가신, 자금책)가 서울지방법원에 진로 장진호 전 회장이 자신의 주식을 가져가고 주식대금 3백억원을 갚지 않았다며 주식반환 청구소송을 냈었다. 장 회장은 80년대 후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진로 경영권 분쟁에서 임 전 의원이 매집한 주식으로 경영권을 장악했다. 결국 당시 경영권 분쟁의 가려진 진실이 송사로 일부 드러났던 것이었다.
진로는 사실상 그때부터 정치권의 손길을 타기 시작해, 97년 부도가 나고 화의기업 국내 1호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법원이 법정관리를 결정함에 따라 장씨일가 손을 완전히 떠나게 됐다. 임 전 의원은 이 과정에 대해 “정치권에 돈을 너무 빨려서 진로가 망하게 됐다”는 주장을 폈다. 이 같은 주장은 그 자신이 DJ쪽 캠프에서 오랫동안 정치자금을 만져왔고, 호남 출신으로 주먹패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정학모의 진로 입성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임 전 의원이 한 만큼 충격적이기조차 했었다.
진로그룹의 창업자 장학엽 회장은 지난 85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진로의 경영권 분쟁은 그 무렵 터졌다. 장학엽 회장이 와병에 들어가면서 당시 진로 사장을 하던 장익용씨(현 서광그룹 회장)와 창업자인 장학엽씨의 2세들간에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장익용 회장은 창업자인 장학엽씨의 큰 동생 장학섭씨의 아들이다. 장학섭씨는 큰형 학엽씨와 함께 진로의 전신인 서광주조를 함께 만드는 등 진로의 초창기에 큰 역할을 했다. 임 전 의원에 따르면 장학엽 회장이 병들 무렵 장진호 회장의 나이는 29세. 때문에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사촌인 장익용 사장이 최고경영자로서 진로를 진두지휘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경영권 분쟁의 발단이 됐다. 임 전 의원에 따르면 와병중이던 장학엽 회장이 “내 아들에게 진로를 찾아주라”는 유언을 임 전 의원에게 남겼다는 것. 장익용 사장이 대표이사를 지내면서 상당부분 진로에 주식 지분을 늘려 장학엽가의 경영권이 위협을 받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촌간의 경영권 싸움은 84년부터 시작해 88년 4월 주주총회에서야 끝이 났다.
임 전 의원에 따르면 그가 매집한 진로주식 때문에 장진호 회장이 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86년부터 대우증권을 창구로 진로 주식을 차명으로 매집했다. 진로 주식 매집에 들어간 돈은 4백억원 정도였고 장학엽씨의 세 아들인 봉용, 진호, 준용 등 3형제의 지분은 24% 정도로, 경영권을 되찾기엔 부족했다. 이때 임 전 의원이 나서서 4백억원을 들여 31.42% 정도의 주식을 매집해 의결권을 장진호 회장에게 써줬다는 것이다.
88년 봄 진로의 정기 주주총회 때의 일이었다. 당시 대표이사로서 주주총회 사회를 보던 장익용 사장은 자신이 선임한 이사 선임안이 의결권 부족으로 통과에 실패하자 총회 도중 스스로 사회봉을 던지고 나가 버렸다. 그때 임 전 의원은 총회에 참가하지 않고 총회장 앞에 차를 세워놓고 차에서 당시 상황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장 사장이 총회장을 나가자 당시 문상목 상무에게 사회를 보라고 지시해 장진호 사장쪽 사람을 중심으로 새 이사진을 선임했다. 문 상무는 율산 출신으로 임 전 의원이 추천해 진로에 몸담은 사람이다.
총회 다음날 언론에서는 그날의 ‘거사’를 ‘장진호 친위 쿠데타’라고 불렀다. 그렇게 진로의 사촌간 경영권 분쟁은 끝났다. 하지만 진로와 정치권과의 악연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장진호와 정치권과의 악연
임 전 의원에 따르면 그의 추천으로 진로에 들어간 정학모씨가 진로의 장진호 회장과 정치권의 연결 통로였다고 한다. 물론 진로의 지분 30%를 갖고 있는 임 전 의원도 관계가 있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두산쪽에서 2천2백억원에 그가 갖고 있는 주식 30%를 넘겨 달라는 제의를 받았었다고 밝혔다. 두산이 소주 시장 진출을 타진하면서 진로의 인수합병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또 그가 몸담고 있는 정치세력쪽으로부터 그 주식을 매각해 정치 자금으로 쓰자는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 제의를 뿌리치고 진로 장진호 회장에게 92년 9월19일 30%의 진로 주식을 넘겼다. 그러나 정치권과 연결통로 역할을 하는 정학모씨는 진로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와 관련, 임 전 의원은 진로에서 빠져나간 돈은 DJ의 외곽조직이던 ‘연청’에 쓰였다고 주장했다. 평민당이나 민주당, 새천년민주당 등 DJ는 정치적으로 어려웠을 때마다 신당창당을 탈출구로 삼았다. 그때마다 바닥에서 조직을 새로 짤 수 있었던 힘은 연청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연청 자금이 바로 진로쪽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장 회장은 임 전 의원의 주식매집으로 88년 그룹 경영권을 되찾고 그해 진로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90년 장 회장의 맏형인 봉용씨와의 갈등을 끝으로 집안정리까지 마친 장진호 회장은 명실상부하게 장학엽가의 2세 경영자로 나섰다. 지난 91년부터였다. 그룹 집권 이후 장 회장은 사업을 크게 벌이기 시작해 88년 5개 계열사가 91년 말에는 18개 계열사로 늘어났다. 이것이 바로 진로 부실의 뿌리가 된 셈이다. 진로가 지고 있는 2조원 가량의 빚 중 상당부분, 그러니까 예보에서 장 회장이 계열사로부터 빌린 뒤 갚지 않았다고 지적한 돈의 상당 부분이 바로 부실 계열사에서 파생된 문제였다.
진로쪽에선 장 회장이 계열사의 상호보증을 해소하기 위해 계열사 명의의 주식을 개인 명의로 바꾸는 과정에서 돈이 없어 계열사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진로의 부실 원인에는 정치 자금에 대한 부담도 상당부분 있었던 듯하다. 경영권을 되찾는 과정에서 정치권에 의존했던 장 회장인 만큼 이후 정치권과의 관계를 끊지 못했다는 것이다. 임 전 의원은 ‘정학모의 존재’를 환기시키며 거액 정치 자금이 빠져나갔고 타격을 크게 입었다고 주장한다. 장진호 회장이 본격적으로 확장 경영을 펼치던 91년 이후는 ‘민주화 정권’인 YS와 DJ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YS 시절에 장 회장은 김현철과 어울렸고, DJ 시절에는 김홍일 의원 쪽과 어울렸다고 임 전 의원은 증언했다. 물론 그 기간 내내 정학모씨가 장진호 회장 옆에 있었다. 주주로서, 또 후배를 추천해 준 까닭에 진로 속사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게 임 전 의원의 증언이다. 그는 진로 쪽에서 정치권에 흘러들어간 돈이 대충 잡아도 7천억∼8천억원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YS와 DJ를 거치면서 진로가 거덜났다는 얘기다. 그는 정치자금과 관련해 더 이상의 자세한 상황은 털어놓지 않았고 자신은 장 회장이 갚지 않은 주식 대금을 받아내는 데 집중할 때라는 점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는 간질환으로 죽었다.
권병찬 기자